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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살인사건사건 사고/미제사건 2020. 5. 30. 16:05
◆ 발생일자 ◆
1931년 7월 31일
◆ 발생장소 ◆
부산 초량 정(현재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의 철도국 관사 15호 다카하시(大橋)의 집
◆ 사건개요 ◆
부산 초량정(현재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의 철도국 관사 15호 다카하시 마사키(大橋正己)의 집에서 조선인 하녀 마리아(변흥례씨)가 처참하게 살해된 모습을 오하시 마사키의 부인 다카하시 히사코(大橋久子)가 발견한 사건이다.
철도국 공제조합 초량 배급소 직원 이노우에 슈이치로(井上修一郞)라는 사람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심증은 있으나, 당시 피의자, 사법부, 경찰 모두 일본인이었기에 이들은 무죄판결을 받아 처벌받은 사람이 없어서 미제사건이 되었다.
◆ 피해자 ◆
변흥례씨(20세·여)
하녀 마리아는 변흥례라는 조선 여인이었다.
변흥례는 1912년 천안군 성환면 가난한 농부의 집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가난한 탓으로 부모 사랑 한번 제대로 못 받고 자랐다. 보통학교조차 다니지 못하고 열 살 때 남의집살이를 시작했다.
열일곱 되던 해에는 천안을 떠나 서울로 가서 일본인 집의 하녀가 됐다.
일본인 주인은 조선 이름은 발음하기 어렵다 하여 변흥례를 마리아 라 불렀다.
그가 19세 되던 해 주인이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자, 주인은 착하고 일 잘하는 마리아를 친구에게 소개했다.
마리아가 옮겨간 곳은 총독부 철도국 사무관으로 근무하던 다카하시의 용산 철도국 관사.아이도 없이 주인과 안주인 둘만 사는 단출한 가정이었다. 이 집에서도 마리아는 성심성의껏 일했다.
1931년 봄 다카하시가 부산 철도운수 사무소장으로 영전하자 마리아도 부산으로 함께 갔다.
마리아는 매월 15원의 월급을 모두 부모에게 보내는 효녀였다.
교육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는데도 일본말을 비교적 유창하게 구사했고, 머리도 다른 하녀가 도저히 따라올 수 없을 만큼 영민했다.주인의 표정만 보아도 맥주가 먹고 싶은지 청주가 먹고 싶은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마리아는 몸무게가 60kg인 마리아는 보통 남자 이상으로 힘이 셌다. 40kg 되는 물건을 들고 2~3㎞는 예사로 오갔다.
그런 마리아는 어느 날 아침 혈흔이 낭자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 사건 상세 ◆
1931년 7월 31일 밤, 부산 초량 정(草梁町) 철도국 관사 15호 다카하시(大橋)의 집에서 두 여인이 잠자리에 들었다.
집주인인 철도국 운수 사무소장 다카하시 마사키(大橋正己)는 사흘 전 일주일 예정으로 진주 방면으로 출장을 떠났다.
집에는 갓 스물을 넘긴 하녀 마리아와 36세의 안주인 다카하시 히사코(大橋久子) 둘만 남았다.
다음날 아침
다카하시 부인은 10시가 다 되어서도 일어나지 않는 마리아를 깨우려고 복도 맞은편 마리아의 방문을 열었다.
그러나 마리아는 자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목에는 생전에 몸에다 대 보지도 못하였던 비단 허리띠가 힘차게 졸려 매었으며, 잔인하게 찔린 음부(陰部)의 자상(刺傷)에는 선혈이 흘러서 원한에 사무친 비린 냄새를 뿜고 있었다.
다카하시 부인의 신고를 받은 경찰이 현장에 도착했다.
부검 결과 범인은 마리아를 목졸라 살해한 후 사체에 잔인하게 자상을 입힌 것으로 밝혀졌다.
마리아의 목에 감긴 비단 허리띠는 다카하시 부인의 것이었다.
◆ 경찰 수사 ◆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발생하자 부산경찰서 형사들은 밤낮없이 분주했다.
그러나 단서는 좀처럼 발견되지 않았다.
더욱이 범죄 장소가 철도국 관사이고 집주인이 고위급인지라, 경찰도 함부로 수사할 수는 없었다.
관사 안팎을 샅샅이 조사했지만 외부에서 범인이 침입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실내는 2층 유리창이 깨진 것 외에는 살인사건의 현장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잘 정돈돼 있었다.
비 오는 날이라 땅이 질었음에도 마당과 뒤뜰에서 수상쩍은 발자국 하나 발견되지 않았다.
현장조사 결과를 놓고 내부인의 소행이라는 의견이 외부에서 침입한 자의 소행이라는 의견을 7대 3 정도로 압도했다.
그러나 경찰은 내부인의 범행이라고 섣불리 단정 짓지 못했다.
내부인은 오직 부인 다카하시 히사코 한 명뿐이었기 때문이다.
범인은 마리아를 처참하게 살해했을 뿐 집안 물건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단순 절도범의 우발적 범행이었을 가능성은 없었다. 이에 대해 가능한 추리는 세 가지였다.
1. 어떤 남자가 연애관계를 맺으려다가 마리아가 그에 순응치 않으니 죽였다.
2. 집주인 다카하시 마사키와 마리아가 불륜관계였고, 이에 대한 질투로 히사코가 죽였다.
3. 다카하시 부인이 다른 남자와의 불륜을 저질렀고, 이를 목격한 마리아를 죽였다.경찰은 마리아의 목을 조른 비단 허리띠가 다카하시 부인의 물건이라는 사실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사건이 발생한 지 10시간이 지나도록 유력한 증거물을 범행 현장에 놓아둘 리 없었을 것이라는 이유였다.
다카하시 부인을 의심하는 사람들도 음부를 찌를 때 사용한 칼은 숨기고 목을 조른 허리띠는 남겨둔 것을 의아하게 여겼다.
경찰이 발견한 유일한 물증은 마리아 침실 전구에 찍혀 있는 지문이었다.부산에는 지문감식 장비가 없어 전구를 경기도 경찰부로 보냈다. 그러나 지문이 희미해 감식이 힘들다는 답이 돌아왔다.
사건은 미궁에 빠지는 듯했다.
사흘 뒤 8월 3일부산경찰서 서장 앞으로 괴(怪) 투서가 날아들었다. 투서의 내용은 장난편지라고 간주하기에는 너무나 구체적이었다.
나는 절도 전과 2 범입니다. 범인은 집안사람입니다.
나는 31일 밤 오전 3시경 철도국 관사 부근을 방황하던 중 돌연히 여자의 부르짖는 소리가 들려 그곳에 가서 유리문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전깃불 밑에 30세가량 되는 여자가 있었고, 그 곁에는 20세 되는 여자가 발가벗고 누워있었습니다.
중년 여자는 한참 생각하다가 벽장을 열고 칼을 꺼내 누워있는 여자의 음부를 찔렀습니다.
입을 물어뜯고 “이년! 이 젖통으로…” 하고 젖통을 물어뜯은 이후,
발로 죽은 여자의 머리를 두 번 차고 배를 밟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유유히 수도에 가서 피 묻은 칼을 씻었습니다.
유리창을 깨고 창살 한 개를 뽑아 가지고 문을 나서 철도병원 앞 공원 풀밭 속에다 파묻었으니 찾아보십시오.
부산경찰서 서장 친전
목격자로부터경찰은 철도병원 앞 공원 풀밭을 조사해보니 실제로 피 묻은 수건과 창살 등이 나왔다.
입술과 가슴을 물어뜯었다는 내용도 부검 결과와 일치했다.
부검 당시 마리아의 입술 전체에는 흰 솜 같은 거품이 덮여 있었다. 거품을 걷어내지 않고는 입술에 찍힌 이빨 자국을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가슴에 난 이빨 자국은 너무 희미해서 여간 자세히 관찰하지 않고는 발견하기 어려웠다.
더욱이 투서가 날아올 때까지 사건은 언론에 보도되지도 않은 상태였다.
투서자가 마리아의 살해 과정을 직접 목격했거나 혹은 투서자 자신이 범인임이 분명했다.
열흘 후
“마리아 살해사건의 범인은 나다”라고 쓴 두 번째 투서가 날아들었다.
첫 번째 투서와 필적이 동일했다. 사건이 언론에 보도된 이후 부산경찰서에는 “분투를 기원한다”, “그와 같은 태도는 또 다른 살인사건을 발생케 한다”, “어찌하여 다카하시 부인을 구속하지 않는가! 불공평하다” 같은 투서가 빗발쳤다.
투서의 내용은 다카하시 부인이 범인임을 시사했지만, 경찰은 투서자가 범인일 것으로 확신하고 투서자 검거에 수사력을 집중했다.그 결과 사건 발생 40여 일 후 철도국 관사 인근에 사는 절도 전과 2 범인 일본인 야마구치를 투서자로 검거했다.
경찰은 언론에 살해범을 잡았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했지만, 며칠 후 야마구치는 투서자와 필적이 비슷할 뿐인 ‘선량한’ 전과자로 밝혀졌다.
사건 발생 한 달 뒤인 8월 29일 새벽 1시 다카하시 부인이 체포되었다.
모토하시(元橋) 검사는 수십 명의 경찰을 자동차에 태워 다카하시의 집으로 향했다.
경찰은 철도국 관사를 포위하고 앞뒤로 경계선을 설정한 후 뒷문으로 급습해 다카하시 히사코를 검거했다.
사건 전후 다카하시 부인의 행동은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이웃의 증언과 부검 결과에 의하면 마리아의 사망 시각은 7월 31일 밤 11시에서 다음날 새벽 1시경이었다.
마리아의 비명은 이웃까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컸고, 마리아의 시신 머리맡에는 소변 자국이 있었다.
그것은 죽기 전 마리아가 몹시 저항했음을 의미했다.
다카하시 부인은 사건 당일 무슨 영문인지 궂은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공원으로 산보를 다녀와서 10시경 잠자리에 들었고,
낮에 수박을 많이 먹은 탓으로 새벽녘 두 차례 화장실에 다녀왔다고 했다.
그런 다카하시 부인이 밤새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는 진술은 믿기 어려웠다.
다카하시 부인은 남편이 출장 간 이후 줄곧 응접실에서 잤는데, 사건 당일에는 마리아의 옆방에서 잤다.
평소에는 마리아가 늦게 일어나면 몹시 꾸중했지만 사건 당일에는 늦게 일어나도 좋다고 했다.
다카하시 부인이 마리아를 그처럼 너그럽게 대한 것은 처음이었다.
8월 1일 아침에는, 다카하시 부인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6시쯤 일어나 창문을 열고 신문을 보았다.
그날만큼은 늘 마리아와 같이 하던 아침운동도 혼자 했고, 아침밥도 손수 챙겨 먹었다.
다카하시 부인은 10시가 다 되어서야 마리아의 방문을 열었고, 마리아의 시신을 발견한 것이다.
신고를 받고 경찰이 도착했을 때 다카하시 부인은 예쁘게 화장하고 한가히 복도 청소를 하고 있었다.부인은 수사를 나온 경찰에게 사건을 조용히 처리해달라고 부탁했다.
다카하시 부인은 한편으로는 이처럼 냉담하게 반응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몹시 초조한 듯 보였다.
사건이 신문에 보도되지도 않았는데 신문에 났다면서 고향에 있는 70세 노모에게 전보를 쳐서 와달라고 했다.
보통사람 같으면 하녀가 죽었다고 일본에 있는 노모를 불러들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다카하시 부인의 진술에는 일관성이 없었다.
일례를 든다면 31일 마리아가 빨래를 하였다고 했는데, 그날은 비가 와서 빨래를 할 수가 없었다.검사에게 빨래한 일이 없다고 하였으나 법정에서는 검사가 검증하러 오기 전에 전부 걷어치웠다고 했다.
또한 31일에 두 차례나 목욕을 했다고 말했으나 8월 1일 검사가 검증을 할 때에는 목욕통에 물이 한 방울도 없었다.
당일 아침 부인은 쓰레기를 청소하는 인부 소리에 잠을 깨었다고 했지만, 그날은 초량 방면에는 쓰레기 청소부가 나가지 않았다.
8월 14일 부인은 부산일보 기자에게 마리아가 고향인 성환으로 가고 싶다고 하기에 마리아의 양복을 지어주기 위하여 양복상을 불렀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부인 자신의 양복을 짓기 위하여 양복상을 부른 것이었다.
검찰은 다카하시 부인이 남편과 마리아의 부정한 관계에 앙심을 품고 마리아를 살해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적극적으로 심문했다.그러나 다카하시 부인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9월 17일 예심에 회부됐고, 예심에서도 유죄가 인정됐다.
그러나12월 14일 1심 재판에서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무죄 방면됐다. 검사의 항고는 대구 복심법원에서 기각됐다.
다카하시 부인의 무죄 방면으로 사건은 다시 미궁에 빠졌다.
이제 남은 유일한 단서는 수사 초기에 날아든 괴이한 투서뿐이었다. 경찰은 철도 관계자와 초량 정 인근에 사는 모든 사람의 필적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조회했다. 그렇게 한 달이 가고, 계절이 바뀌고, 한 해가 저물었다.
1933년 2월 17일, 사건 발생 1년 6개월 만에 경찰은 제3의 인물을 용의자로 검거했다.
용의자로 체포된 인물은 이노우에 슈이치로(井上修一郞). 철도국 공제조합 초량 배급소 직원이었다.
이노우에는 처음 조선에 나와서 철도국 공제조합 용산 배급소에 있을 때부터 용산 철도국 관사에 있는 다카하시 부부와 면식이 있었다. 이노우에가 부산 초량 배급소로 발령이 나고 잇따라 다카하시가 부산 운송 사무소 소장으로 영전하자 이노우에와 다카하시 부인은 수시로 만나는 사이가 됐다. 항간엔 이노우에가 다카하시 부인의 정부(情夫)라는 소문도 있었다. 경찰은 사건 발생 직후부터 이노우에를 다카하시 부인과 함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다.
이노우에 슈이치로를 범인이라고 추정하게 되기까지 부산경찰서의 수사는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었다. 괴 투서 등으로 사건이 복잡해졌고, 물적 증거는 거의 인멸되었다. 다카하시 부인이 무죄로 풀려나자 외부에서 침입한 자를 찾기 위해 노력한 결과 부산경찰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혀냈다.1. 사건 발생 당일 오후 8시경 다카하시의 관사 앞을 배회하던 로이드안경을 쓴 30세 내외의 사나이가 있었다.
2. 사건 후 이노우에는 머리를 특별히 깎았다.
3. 사건 직후 이노우에가 애정문제로 괴로워하며 종교를 천리교에서 불교로 개종했다.또, 사건 발생 전 다카하시 부부가 철도국장의 장례에 참가하기 위해 2~3일간 집을 비운 틈을 타서 마리아와 관계를 맺은 사실을 밝혀냈다. 그러나 무슨 이유로 마리아를 그처럼 잔인하게 살해했는지는 밝혀내지 못했다.
검사는 이노우에의 단독범행으로 인정하고 예심에 회부했다.검사는 마리아 참살 사건이 이노우에의 우발적 범죄라고 판단했다.
검사가 정리한 사건의 개요는8월 1일 새벽 1시경 이노우에가 부엌문을 통해 다카하시의 집에 잠입해 마리아를 강간하려 했으나 마리아가 응하지 않자 살해하고 부엌문으로 도주했다는 것이다.
검사는 사건 직후 부산경찰서에 날아든 괴 투서를 증거물로 제시했다. 도쿄, 오사카에서 활동하는 전문가에게 의뢰하여 필적을 감정한 결과 투서의 필적과 이노우에의 필적은 정확히 일치했다.
8월 1일 마리아의 시신이 발견된 이후 이노우에는 연이어 수상한 행동을 했다. 사건 전후 다카하시 집안에 대한 이노우에의 태도는 너무 달랐다. 이노우에는 수시로 그 집에 출입했는데, 정작 하녀가 살해됐을 때는 남편이 출장 간 사이 변고를 당한 부인이 몇 번이나 와달라고 독촉해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노우에는 이틀 후에야 마지못해 다카하시의 집에 나타났다. 무서우니 당분간 집에 묵어달라는 다카하시 부인의 부탁도 들어주겠다고 하고선 들어주지 않았다. 사건 직후 이노우에는 이름을 ‘슈이치로(修一郞)’에서 ‘류우(隆雄)’로 바꿨다. 개명 사유는 슈이치로라는 이름이 누군가를 살해할 불길한 이름이라는 것이었다. 이노우에는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다면서도 마리아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고, 서울과 만주에 새 직장을 알아보았다.
부인으로 일관하던 이노우에는 제6회 경찰 심문에서 범행을 자백했다.8월 1일 새벽 1시 30분경 마리아를 강간할 목적으로 다카하시의 집에 침입했고, 그녀가 소리를 지르자 충동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범행을 자백하면서 이노우에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심문하던 경찰에게 염주를 갖다 달라고 말했다.
이노우에의 자백에도 불구하고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우선 마리아를 살해할 당시 큰 소란이 있었는데 옆방에서 자던 다카하시 부인이 깨지 않았다는 점이 석연치 않았다. 우발적인 살인이었는데 수법이 그처럼 잔인했던 것은 무슨 이유인지도 설명하지 못했다.또한범행 시각도 이웃의 증언이나 부검 결과와는 상이했다. 이웃집 하녀는 마리아의 비명소리를 11시에서 12시 사이에 들었다고 증언했다. 그것은 사망시각이 식후 3~4시간이 지나서라는 부검 결과와도 일치했다. 그러나 이노우에가 자백한 범행시각은 다음날 새벽 1시30분이었다. 이노우에는 12시까지 중앙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있었다고 진술했다. 영화를 보는 도중 잠시 빠져나와 살인을 하고 다시 극장으로 돌아갔을 가능성은 없었다. 부검결과와 이노우에의 자백, 둘 중 하나는 거짓이었다.
제11회 경찰 심문에서 이노우에는 진술을 번복했다. 마리아를 강간할 의도는 애초부터 없었다는 자백이었다.
이노우에가 다카하시 집에 수시로 출입을 하게 되는 사이 어느덧 다카하시 부인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다카하시 마사키는 1931년 6월 28일부터 7월 2일까지 경제조사차 거창지방에 출장을 가느라 집을 비웠다.
같은 해 7월 24일 저녁 둘은 다카하시 부인의 침실에서 밀회를 즐기다 마리아에게 발각되었다.
크게 낭패한 다카하시 부인은 마리아의 입으로부터 이 사실이 흘러나온다면 자기는 파멸하고 말 것이라 우려했다.
마리아를 해고시키려 했으나 심성이 선량하여 주인의 신용을 받는 마리아에게는 해고시킬 구실이 없었다.
다카하시 부인은 영원한 함구 책으로 마리아를 살해하기로 결심하고 이것을 이노우에와 상의했다.
두 사람은 7월 29일부터 약 1주일 예정으로 다카하시 마사키가 진주지방에 출장 간 기회를 이용하여 범행을 저질렀다.
이노우에의 진술은 상당히 구체적이었다.‘범행은 다카하시 부인의 치밀한 계획 하에 단행되었다. 7월 29일에는 이웃집 쪽으로 난 창문에 막을 쳐서 거사가 탄로 나는 것을 방지했고, 30일 밤 다카하시 부인은 초량 정 중앙극장에 영화구경을 가서 밤늦게까지 마리아를 못 자게 피로하게 만들었다. 31일 저녁에는 양복점 재단사를 불러 마치 마리아를 고향으로 보낼 때 입힐 양복을 주문하려는 것처럼 보여서 환심을 샀다.
당일 오후 9시경, 마리아에게 자라고 하고 산책 가는 것처럼 공원에 나가서는 미리 와 기다리고 있던 이노우에를 데려왔다. 두 사람은 10시가 조금 지나서 다카하시 부인의 침실에 들어왔다. 전날 밤 세 시간밖에 못 잤던 마리아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이노우에는 장롱에서 허리끈을 꺼내 들고 부인과 함께 마리아의 방으로 갔다. 깊이 잠든 마리아의 목을 허리끈으로 옭아매고 오른발로 마리아의 어깨를 누르면서 힘껏 끈을 당겼다. 다카하시 부인은 마리아의 다리를 눌러서 반항하지 못하게 도왔다. 마리아가 발버둥 치다 죽은 후 다카하시 부인은 변태성욕자의 소행으로 가장하기 위해 부엌칼을 가져와 시신의 음부를 찔렀다.
이노우에는 경찰 조사에서 두 차례 서로 다른 자백을 했다. 정황상 두 번째 자백이 신빙성이 있었다. 그러나 검찰 조사와 예심에서는 또다시 범행 일체를 부인했다. 예심판사는 7개월 동안의 심리 끝에 1933년 11월 8일 이노우에와 다카하시 부인을 공범으로 인정하고 공판에 회부했다.▣ 법정공방 ▣
예심 결과 마리아 살인 사건의 주범은 다카하시 부인, 종범은 이노우에였다.
그러나 정작 공판에 회부된 것은 이노우에뿐이었다. 검사가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들어 다카하시 부인의 기소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1934년 1월 27일 선고공판에서 재판정은 이노우에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그러나 검사의 논고와는 달리 판결문에는 다카하시 히사코가 주범, 이노우에 류우가 공범이라고 명시했다.
이로써 다카하시 부인은 재판부로부터 주범으로 지목되고도 검사의 기소가 없어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하는 기이한 처지가 됐다.
검사는 “이노우에만을 단독으로 처벌해달라고 했는데, 예심 정과 판결 언도가 다카하시 히사코가 공모한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 다카하시 히사코를 기소할 생각은 없다”며 끝내 다카하시 부인을 기소하지 않았다.
다카하시 부인을 주범으로 명시한 판결문이 알려지자 여론은 들끓었다.
2심 재판은 1934년 4월 30일부터 8월 6일까지 대구 복심법원에서 일사천리로 진행됐다.2심 재판에서도 기소되지 않은 다카하시 부인이 마리아를 죽였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여전히 쟁점이었다.
2000만 조선인은 재판부의 현명한 판단으로 마리아의 원혼을 달래줄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2심 재판부는 증거 불충분을 사유로 이노우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노우에와 다카하시 부인과=의 불륜관계 증거가 없으며 마리아가 살해된 시각 영화를 보고 있었다는 이유였다.
이렇게 해서 만 3년을 끌었던 마리아 살인 사건은 관계자가 모두 무죄 석방되고 영구 미제사건이 됐다.
조선 소녀 마리아 변흥례는 일본인의 집에서 억울하게 죽었지만,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부조리가 널려 있던 1930년대 중반 식민지의 백성이 삼켜야 했던 또 하나의 아픔이었다.